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프가니스탄 왕국 (문단 편집) === 급격한 근대화 === [[모하마드 나디르 샤]]가 칼라카니를 쫒아내고 바라크자이 왕조를 복구했지만 순순히 아마눌라 칸에게 왕위를 돌려줄 생각까진 없었다. 애초에 아마눌라 칸이 칼라카니를 이기지 못해 2달 만에 도망치는 꼴을 보고도 왕위를 넘겨줄 생각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만...[* 아마눌라 칸은 죽을때까지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추축국]]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추축국이 처참하게 패망하면서 아마눌라 칸의 헛꿈도 무위로 돌아갔다.] 어쨌든 모하마드 나디르 샤는 아마눌라 칸의 개혁안 대부분을 폐기하고 보수적인 스탠스로 회귀했고, 그대신 군대를 강화해 내정을 안정화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마눌라 칸을 국외로 몰아낸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신와리 반란,[* 불과 몇년전 아마눌라 칸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신와리족이 이번엔 반대로 아마눌라 칸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그냥 반란이 하고싶었던것--] 길자이 반란, 다레 켈 반란 등 수많은 봉기가 일어났고, 심지어 [[소련군]]이 우즈벡 반군 지도자 이브라힘 벡을 찾으러 아프간에 무력진입을 시도하며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1년 즈음에는 어찌어찌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나디르 샤는 주로 자기 가족들로만 구성된 10명의 내각을 임명했고, 1931년에는 [[개헌]]을 해서 [[입헌군주정]]으로 나라 체제를 전환했다. 물론 입헌군주정은 허상일 뿐이었고 아프간은 사실상 왕과 그 측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과두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국민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헌법이라는 가림막을 동원했을 뿐이었다. 다만 이렇게 나디르 샤가 아마눌라 칸의 정책 대부분을 뒤엎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시도를 아예 안한 건 아니었다. 아마눌라 칸에 비해 훨씬 덜하긴 했으나 1931년 아프가니스탄 최초로 [[카불]] 대학교를 설립했고, [[힌두쿠시 산맥]]을 뚫는 거대한 도로 건설에 착수했으며 은행 시스템 구축과 장기 경제 계획을 꾸렸다. 그가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썼던 군사 개혁은 비록 그 속도는 느렸지만 그가 죽을 1933년 즈음에는 무려 4만 명에 달하는 현대식 군대를 육성하기까지 했다. 나름 근대화를 할만큼 하고 있던 나디르 샤는 1933년 11월 8일 고등학교 졸업식 참관 도중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압둘 할리크 하자라였다. 이전 [[하자라족]]에 대한 징수 조치에 대한 불만을 품고 왕을 죽인 걸로 추정된다. 곧바로 체포되어 손가락을 잘라내고 눈을 도려내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임당했다.] 나디르 샤가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다만 자히르 샤가 즉위 당시 고작 19살 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바로 친정을 시작하진 않았다. 대신 삼촌 모하마드 하심 칸 총리가 섭정을 맡아 일을 처리했는데, [[국제연맹]]에 이때 가입했으며 특히 [[미국]]의 인정을 받는 외교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프간을 둘러싸고 있는 전통적인 적대국 [[소련]]과 [[영국]] 대신 [[추축국]] 세력과 관계를 진전시키려 시도했다.[* 이 일환으로 [[중화민국]]과 싸우고 있던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압도적인 물량을 견디기엔 무리였고 동튀르키스탄은 결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재편입되고야 만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립을 유지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망하지 않게 해준 현명한 선택이었다. ||[[파일:156334955_1451001426.jpg|height=3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Zahir_Shah_of_Afghanistan_in_1963.jpg|height=300]]||[[파일:E8aqIkSWYBAFlKq.webp|height=300]]||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 ||소풍을 나온 [[카불]]의 '''여학생들'''[* 물론 저렇게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여학교를 다니며 소풍까지 나올 수 있는 여인들은 당연히 상류층에 속했다. 지방으로 갈수록 보수적인 풍조가 강해졌다. 하지만 그 답답한 [[부르카]]를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 채로 마음껏 노다니는 소수의 여인들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현대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자유로움'''이다.] || 1944년 동남부 지역에서 다시 자드란과 사피, 망갈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47년 진압되었다. 한편 내부의 반란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온세계가 쑥대밭이 되는 꼴을 지켜보던 자히르 샤는 본격적인 현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46년 왕의 다른 삼촌인 샤 마흐무드 칸이 새 총리로 임명되어 수많은 외국 고문들이 아프간 국내로 유입되었고, 1949년엔 비교적 자유로운 총선거가 치러졌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자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 서북부의 파슈툰인 다수 지역 역시 어디에 귀속될지 선택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키스탄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친미 성향이었던 파키스탄과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점차 친소 성향으로 기울어졌고, 특히 1953년 총리가 된 왕의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 칸]]은 적극적으로 친소 성향의 정책을 폈다. 다만 미국과의 관계를 끊은 건 아니었다. 지금과는 달리 아프간은 중간에서 중립 정책을 폈고,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에게서 동시에 지원을 받은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였다.[* 자히르 샤는 '나는 자본가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회주의 역시 원하지 않는다.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우리가 러시아나 중국의 하인이 되거나 타국의 종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외교관이 어땠는지 잘 알려주는 발언.] 다우드 칸은 남서부 헬만드강 유역에서 관개 사업을 진행하고,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등 개혁 정책을 폈다. 동시에 파키스탄과는 적대 관계가 심해져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파키스탄뿐만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내 소수민족도 파키스탄 서북부가 아프가니스탄령이 되면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족의 지배 구도가 더욱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국교 단절로까지 치달으면서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은 경제 위기에 빠져들었고, 자히르 샤는 1963년 다우드 칸 총리를 해임했다. 이후 1964년 의회제와 보통선거를 명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아프가니스탄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으며, 선거에서 당적 표명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처럼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은 1965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되어 있었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등 아프간 국내 좌익 인사들에 의해 세워져 농민, 노동자, 극빈층 등의 지지를 받으며 강세를 키워나가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좌익 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내 PDPA는 내분으로 할크파와 파르참파로 분열되었고, 이후 분열된 상태가 지속되게 된다. 여러모로 자히르 샤는 자비로운 군주에 속했다. 그 오랜 재위 기간 내내 누구에게 공식적으로 사형을 언도한 적도 없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형량을 줄이거나 사면하는 데에만 국왕 특권을 사용했고 정치력과 성품 역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쫓겨나기 전 사바크 등 비밀경찰들을 동원해서 반대자들을 일방적으로 탄압했던 이웃국가 [[이란]]의 마지막 군주인 [[팔라비 2세]]와는 다르게 무척 온건했다. 게다가 특히 1964년 도입된 헌법에는 자유 선거, 시민의 손으로 뽑히는 민주적인 의회, 시민권과 정치권, 여성들의 권리, 보통 참정권처럼 심지어 현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개혁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때야 아프간인들도 나름 왕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자히르 샤의 오랜 평화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헬게이트]]가 열리자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회상하는 아프간인들이 많을 지경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는 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